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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가 헐리고 1950년 전쟁 후엔 용두산에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1954년 대화재로 판자촌이 초토화 되어 철거된 후 1955년 용두산은 다시 공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름은 용두산이 아닌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공원이었다. 용두산이 그 이름까지 다시 환원된 것은 1960년 4.19혁명 후이다.  


 



지금 이용하는 용두산 길들은 1915년 용두산공원이 만들어질 때 형성된 길들이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광복동에서 공원 올라가는 194계단 길에 지금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있다.   


 



첫번째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지점에 미타선원이 있는데 그곳 법당에서 내려다보면 가림막에 둘러싸인 계단이 마치 용의 몸통처럼 산을 감싸고 올라가 용두산이란 이름에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부산호텔에서 올라가는 길이다.





이 길 끝에서 보는 풍경은 다소 기하학적이다. 


 



가장 걷기에 좋은 길은 근대역사관에서 올라가는 길이다. 양 옆으로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고

 




길을 따라 시비도 세워져 있다.


 



이 길 중간 쯤을 넘어서면 데크가 설치된 용두오름길이 나온다. 원래는 미화당백화점에서 구름다리로 이어진 길이 있었다. 미화당백화점은 몇년 전 철거되었다. 그 후 언제부턴가 이 길이 생겼다.


 




 

 1915년 용두산공원이 만들어지기 이전엔 용두산신사가 지금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 있었다. 1915년 정상부를 넓히면서 신사는 지금의 부산타워 자리로 옮겼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56년 세워졌다.




 

용두산공원은 기념물의 전시장이다. 일본의 상징이 불타 사라진 뒤 한국의 상징들이 용두산공원 공간을 채워갔다. 이순신장군 동상 아래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시민의 종은 1996년 시민의 모금으로 만들어졌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상은 1989년에 준공되었다. 


 



용두산공원에 당연히 있어야할 것 같은 용상은 1973년에 세워졌다.



참고로 용두산이란 이름이 조선침략의 야욕을 품은 명칭으로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이 있는데 부산 향토사학자 주경업 선생은 이런 주장을 허구라고 한다. 우리나라엔 '용'자를 쓴 지명이 많은데 용두는 "서울 서대문구 용두동을 비롯하여 각곳에 용두마을, 용두동, 용두리 등 땅이름으로 우리네 마을 곳곳에 무수히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주경업 선생은 용두산 역풍수가 "일본인의 못된 심리전일 뿐더러 허무맹랑한 소리임을 깨달아야"한다고 일갈한다.  





충혼비는 1957년 6월 군인유족회 부산지부에서 세운 것이다. 1983 대청공원에 새로이 충혼탑을 건립하여 부산 출신 영령들을 모셔가면서 지금은 당시의 비문과 조각품만 보존하고 있다.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용두산공원엔 해병대 사령부가 주둔했다. 이 비는 2002년 9월 해병대 사령부 주둔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구석구석 돌에 새겨진 헌장들도 몇 개 보인다.





용두산공원 내려가는 길 어귀에 있는 어린이헌장.





부산시민헌장은 2005년 시민들의 의견을 받아 내용을 새롭게 해서 새겨진 것이다.


  




심지어 여배우 조형물도 용두산공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용두산공원에 앞으로 또 어떤 기념비가 세워질까? 그런데 바로 앞의 백층짜리 롯데빌딩이 세워지면 용두산공원의 상징성이 퇴색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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