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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엔 문이 3개 있었다. 연향대청에 잔치가 베풀어질 때 일본 사신들만 출입하는 연향문이 북쪽에, 죽은 일본인의 시신을 운반하는 수문(水門 )이 남쪽에, 초량왜관의 주요 출입문인 수문이 동쪽에 있었다.  


초량왜관을 노래했던 지로우에몽은 수문(守門 )을 나서면 오른쪽엔 오륙도 왼쪽엔 산이 보인다고 했고 2정(약 216미터) 정도 걸어가면 자그마한 언덕들이 나온다고 했다. 변박의 초량왜관도는 지로우에몽의 묘사와 일치한다. 돌담을 꺽어 만든 수문(守門)의 오른쪽은 바다고 왼쪽은 산이다. 수문(守門)에서 해변을 따라 북쪽의 좀 떨어진 곳에는 언덕들이 보인다.


 

일본 교코대 타니무라 문고에서 소장 중인 '조선회도'. 왜관과 왜관 문밖에서 열리던 아침시장 양흥숙 박사 제공


초량왜관은 동래부에서 발행하는 첩문을 가진 자가 아니면 출입을 할 수 없었다. 일본인은 수문(守門) 밖을 나갈 수 있었지만 제한된 구역이었고 석양 무렵에는 문 안으로 돌아와야 했다. 수문(守門)에는 이런 양국인의 출입을 감시하는 초소가 있었다. 고왜관과 달리 안쪽에서도 걸어잠글 수 있는 초량왜관엔 문 안과 밖, 일본과 조선 양쪽에 설치되었다. 


수문(守門)은 12칸으로 꽤 넓었다. 초소 외에도 마구간이 있었고 문 양쪽에는 조선인 통사의 방이 있었다. 장교 2명과 문지기 2명이 10일 교대로 문을 지켰다. 통사는 초량왜관 내에서 발생한 업무를 통보받고 훈도와 별차에게 알리는 역할이었다는데 2명이 5일 교대로 근무했다. 


 

부산박물관 전시 그림

 


수문(守門)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수문(守門) 밖에선 양국인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활기찬 장면이 펼쳐졌다. 일본인들에게 싱싱한 생선, 과일, 채소 등을 공급해주기 위해 조선이 허락한 조시가 매일 아침 수문(守門) 밖에 열렸다. 


조시엔 조선인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초량왜관은 남자들만의 세계였다. 비싸고 품질이 나쁘더라도 어리고 예쁜 여자의 물건이 더 잘팔렸다. 나중엔 조시에 참여하는 남자가 한명도 없을 정도까지 되었는데 동래부사 권이진은 이를 두고 조시에서는 어채(魚菜)를 파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파는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결국 1710년 조선은 조시에 젊은 여자가 참여할 수 없도록 규제한다.



동래부사 권이진의 유화당집



권이진은 조시를 통해 백성들이 일본인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것을 막기위해 거래물목을 축소하고 수세를 했다. 그러자 상인들이 조시를 보이코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유화당집에서 권이진은 이 사태를 이렇게 적고 있다. "간신배들이 전처럼 교통하고자 애초 조시에 나오지 않았고, 서로 선동하고 헛소문을 퍼뜨려 일본인을 꾀어 공갈의 말을 하도록 하였다." 그만큼 조시가 활성화되었고 조시를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정보 공유와 은근한 연대도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와 동래부사 권이진의 노력에도 초량왜관의 양국인 간의 교류에 대한 규제는 성공하지 못한 거 같다.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과 일본인 통역관 사이의 문답기인 '표민대화' 19세기 중반 기록을 보면 조선인 아이들이 일본인에게 떡과 엿을 팔기 위해 매일 왜관을 출입한다는 내용이 있다. 전라도 뱃사공이 울산을 가다가 왜관 안을 구경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용두산공원이 초량왜관 자리이고 왼쪽이 아미동.



초량왜관의 일본인들도 경계를 어렵지 않게 드나들었다. 북쪽의 설문을 넘어가는 건 통제받았지만 서쪽은 어렵지 않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왜인들은 봄과 가을 구덕산의 꽃과 단풍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인과 마주치면 서로 싸우기도 했는데 1700년대 후반 통역인 오다이쿠고로오의 '초량화집(草梁話集)'을 보면 아미동 젊은이들과 왜관 왜인들이 돌을 던지며 싸웠다는 얘기가 나온다. 임진왜란의 영향에다 왜관 왜인들이 주변 민가의 여자를 희롱하거나 가금류를 잡아가는 등 민폐를 끼쳐 부산 사람들의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었다.


 

대전 아드리아 호텔에 원본이 걸려 있는 '포산항견취도'(1881). 위에 있는 섬이 영도이고 아미동은 오른쪽 쯤에 있다.

 


그런데 한 사건을 계기로 아미동 젊은이와 왜관 왜인들의 돌멩이 싸움이 멈추게 된다. 조선시대 영도는 나라의 말을 길러내는 국마장이었는데 아미동 젊은이들이 그 말을 배에 싣고 내리는 일을 맡았다. 어느 핸가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초량왜관의 왜인들이 그 배의 사람과 말들을 구해냈다. 그때로부터 아미동 젊은이와 왜인 간의 돌멩이 싸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1876년 초량왜관이 일본의 조계지가 된 후 수문 자리엔 일본 제일국립은행이 들어섰다. 일제시대 논문은 수문이 본정 1정목 제일은행 사환숙소 자리였다고 한다. 현재는 부산호텔 바로 밑을 수문의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일본인 전용호텔인 부산호텔 앞이라 여전히 일본인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다. 초량왜관의 역사성이 지금도 이어지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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