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가 헐리고 1950년 전쟁 후엔 용두산에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1954년 대화재로 판자촌이 초토화 되어 철거된 후 1955년 용두산은 다시 공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름은 용두산이 아닌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공원이었다. 용두산이 그 이름까지 다시 환원된 것은 1960년 4.19혁명 후이다. 지금 이용하는 용두산 길들은 1915년 용두산공원이 만들어질 때 형성된 길들이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광복동에서 공원 올라가는 194계단 길에 지금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있다. 첫번째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지점에 미타선원이 있는데 그곳 법당에서 내려다보면 가림막에 둘러싸인 계단이 마치 용의 몸통처럼 산을 감싸고 올라가 용두산이란 이름에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부산호텔에서 올라가는 길이..
중앙대로 702번길 전포 방향(전방 왼쪽에 부전도서관) 가로로 찍은 사진. '묵고갈래 싸가갈래' 분식집 앞 로타리 쥬디스태화 옆 젊음의 거리(중앙대로 692번길) 복개천 방향 젊음의 거리 전포 방향 중앙대로 702번길 복개천 방향 동천로 85번길. 전방에 살짝 보이는 노란 건물은 놀이마루 전방에 파스꾸찌 전방에 노랑통닭. 바로 옆에 접:대. 할매복국 골목. 서전로 10번 길. 전방은 제일은행 건물. 중앙대로 680번가 길. 뒤편이 브릭스커피. 동천로. 전방 우측이 부전도서관.
이것도 구덕운동장 벼룩시장에서 샀다. 40대라면 80년대 손 잘 닿는 구석에 이런 가요책이 쑤셔넣고 보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책방에서 500원 정도면 살 수 있는데 최신가요 악보와 가요계 최신 동향이 실려있고 좋아하는 스타들 브로마이드도 책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83년도엔 조용필 혜은이가 폭발적 인기를 누리던 때다. 비유하자면 조용필은 엑소였고혜은이는 트와이스였다. 영화계에선 ET가 꽉 잡고 있었다. 김창완 씨는 지금과 달리 상당히 분위기가 잡혀있다. 당시 그룹 산울림의 리더였댜. 잡지가 소개하는 미녀가수 3명을 보자. 먼저 섹시가수 방미. 현아나 이효리보단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 있는데 어쨌든 당시엔 그렇게 불러줬다. 누구나 다 따라부를 수 있었던 편안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예쁜 얼굴로 가수 하신..
일본은 초량왜관 설치와 동시에 3개의 신사를 건립했다. 용두산에 금도비라신사(고토히라진자)와 변재천신사(벤자이텐진자)를 세웠고, 용미산엔 옥수신사(타마다레진자)를 세웠다. 그 후 도하신사(이나리진자)와 조비내신사(아사히나진자)를 더 세워 초량왜관에 모두 5개의 신사가 있었다. 초량왜관의 신사들은 기복신앙적 성격의 제신들을 주로 모셨다. 금도비라신사와 조내비신사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였고 변재천신사와 도하신사는 재물신과 상업신이었다. 용미산의 옥수신사만 유일하게 고대 전설적 무장과 관련된 신사였다. 출처 : 일본위키피디아 금도비라궁 이들 신사들 중 가장 중심적인 신사는 대마도주 요시자네가 용두산 꼭대기에 세운 금도비라신사다. 금도비라신사는 개항 후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되었다가 1899년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