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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는 욕업

- 노무현 대통령 굵은 허벅지

- 마산의 민주항쟁은 창원의 브랜드

- 선출된 권력(단체장)과 선발된 권력(공무원)

- 통합 창원시의 리더쉽은 무지개



'이 허성무가 그 허성무 맞나?' 여기서 이 허성무는 김현정 뉴스쇼에서 이준석과 함께 대담을 벌이는 허성무 새미래정책연구소 소장이고 그 허성무는 창원에서 여러 차례 선거에 도전한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허성무 위원장입니다. 두 허성무는 같은 허성무입니다. 방송에서 본  허성무가 낯설면서 신선하다고 합니다. 몰랐는데 차분하게 말 잘하고 날카롭다고 합니다. 허성무를 만났습니다. 이 허성무처럼 날카로웠고 저 허성무의 정치적 의지도 전혀 꺽이지 않은 허성무였습니다.




우문일 수도 있는데 정치란 무엇입니까?


교과서에서는 정치를 ‘가치의 권위있는 배분’이라고 하죠. 배분을 잘 못하고 그 권위가 떨어지는 순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정치입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정치는 허업’이라고 하셨는데 그 분은 자기 할 일 다 하고 은퇴했으니 하시는 말이고 현직, 현역으로 뛰는 정치인들은 욕을 먹더라도 최선을 다 하는 게 정치죠. 정치는 욕업입니다.


정치하시면서 욕을 많이 들으셨나요?


맨 처음 정치할 땐 ‘전라도 당을 왜 하느냐’는 소릴 들었죠. ‘빨갱이’ 소리도 숱하게 들었고요. 하다 하다 할 게 없으니까 나중엔 ‘정치하는 놈은 다 도둑놈이다’ 이렇게 한통속으로 몰아버리데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욕을 많이 들었던들 노무현 대통령만큼 들었겠습니까? 선거 도와드리면서 지켜봤는데 욕업 하면 노무현 대통령이시죠.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욕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우리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시잖아요.





노무현 대통령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86년 초 부산미문화원 투석 사건으로 선배들이 구속되었을 때 재판정에서 처음 봤습니다. 변호사가 노무현 대통령이었죠. 얼마 뒤 저도 부산미문화원 점거를 시도하다 구속이 되었는데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 무료로 변론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었죠. 노무현 대통령이 저의 변호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인상적인 기억 하나만 이야기 하시면


너무 많은데요.(웃음) 모든 게 인상적이면 아무것도 인상적이지 않잖습니까? 정말 그 정도로 모든 게 강렬했던 분이셨어요. 88년 부산 동구에 국회의원 출마하셨을 때 선거 도와드리면서 노무현 대통령 자택에서 3일간 잔 적이 있어요. 영화 변호인에도 나오는데 남천동 삼익비치 라고 당시 부산에선 제일 좋은 아파트였죠. 노무현 대통령이 주무시다 거실에 나와서 전화를 받는데 한참을 이야기 하시더니 버럭 화를 내시면서 “그따위 협박 전화할려면 끊어.” 하시더라구요.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속옷차림이었는데 흰 메리야스에 사각팬티를 입고 계셨어요. 당시 속옷은 다 그거였죠. 허벅지가 무척 굵으시더라구요. 하체가 튼튼하시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웃음) 





부산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네요.


제가 부산대학교 행정학과를 나왔습니다. 학생운동을 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면서 20대 대부분은 부산에 있었죠. 지금도 부산대 앞 비봉식당 돼지국밥 기억이 생생합니다. 진주 아지매였는데 인심이 후했어요. 아지매가 학생들 주머니 사정 생각해서 많이 줬어요. 


돼지국밥 좋아하십니까?


물론이죠. 제가 돼지국밥 마니아입니다. 지난 지자체 선거 때 저를 수행하던 분의 부인이 남편 접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해요. 남편 몸에서 돼지국밥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유세 다니면서 거의 돼지국밥만 먹었거든요. 학창시절엔 돼지국밥이 500원 정도 했는데 그거 사먹을 형편이 안되서 250원인가 주고 국물을 사서 도시락에 말아먹고 그랬죠. 요즘은 친구가 하는 창원 북면의 전통 순대집에서 자주 먹고요. 진해 해군체력단련장 앞에 돼지국밥집에도 종종 갑니다. 제가 돼지국밥을 좋아하니까 제 가족도 다 좋아합니다. 





고향이 창원 어딥니까?


창원시 마산 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736번집니다. 저희 동네에서 직선 거리로 4키로 정도에 ‘갓뎀산’이라고 있어요. 미군들이 산을 보고 갓뎀갓뎀 하니까 그걸 듣고 따라 부른 건데요. 원래 이름은 여왕산인데 6.25때 고지전이 대단했죠. 희생이 아주 많았고 그래서 미군이 갓뎀 하며 욕설을 날렸던 거죠. 그만큼 저희 동네가 육이오 때 전쟁이 치열했던 곳입니다. 격전지라 불발탄이나 탄피가 많았는데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탄피 모아 고물상에서 엿바꿔 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교 가니까 불발탄에 손목 잃은 친구가 2명이나 있더라구요. 그중 찬숙이란 친구가 있는데 지금은 아랫 동네 이장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도 만났죠. 


어렸을 때면 전쟁이 끝난지 20년이 넘었을 땐데


20년이 지나도 고향 곳곳에 전쟁의 휴유증이 남았죠. 외가 쪽 먼 친척인데 주천아재라고 실력이 좋기로 소문난 목수 한 분이 계셨어요. 한국전쟁 참전용사신데 전쟁 중에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차고 다니셨죠. 어머니가 “오빠 몸도 불편한데 일을 좀 엥간히 하시지예.”하고 늘 염려하셨죠. 전쟁이 끝난지 꽤 되었지만 그 휴유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전쟁의 참혹함 그런 걸 체감하고 자랐죠. 


마산이면 전후 민주항쟁이 가장 격렬한 도시였는데 그런 분위기는 느끼셨나요?


마산 중앙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입학할 때 젊은 선생이 많았어요. 그 분들이 어렸을 때 315마산항쟁을 목격하신 분들이었죠. 4.19가 다가오면 선생님들 중 몇 분은 한 달 내내 당시 얘기를 하면서 열변을 토하셨죠. 10.18부마항쟁이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났습니다. 그날 경남대생들이 스크럼을 짜서 학교가 있는 산복도로까지 올라왔어요. 교련선생님이 학생들 합류하지 못하게 몽둥이를 들고 교문을 막고 그랬죠. 저녁에 대학생과 수업을 마친 고등학생, 일을 마치고 나오는 노동자들이 시내로 진출해서 북마산파출소 불태워버렸습니다. 마산이란 이 작은 도시가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독재정권을 두 번이나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마산의 그 자랑스런 역사가 지금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315부정선거에 항거해 이승만 정권 무너뜨리고 부마항쟁으로 박정희 정권 막을 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87년 610항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도시가 부산과 마산입니다. 이 작은 도시 마산이 독재정권을 3번 무너뜨렸습니다. 통합 창원시가 도시 브랜드를 만든다면 마산의 민주화를 놓쳐서는 안될 겁니다. 민주화 브랜드를 승화하는 그런 행사를 기획하고 그렇게 해서 창원의 브랜드를 높여야죠.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냐?’며 민주화 브랜드에 이런 딴지를 거는 사람도 있지않을까요?


민주주의가 밥먹여주죠. 전세계 선진국 밥 잘먹고 잘 사는 나라들 중에 민주주의 안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민주주의 안된 나라 중에 잘먹고 잘사는 나라 있죠. 석유가 많아서 왕정해도 잘 사는데 사우디 같은 나라.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민주주의 잘 된 나라가 선진국이고 선진국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선진국과 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에서 근무했는데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민원제도비서관을 했습니다. 제가 비서관 하던 시절 경남 지자체장들은 전부 한나라당이었습니다. 고향사람이라고 찾아오지만 솔직히 당도 다르고 도움을 줘봤자 공이 저한테 돌아오지도 않는데 그리 반갑지 않죠. 


그럼 안 도와줬습니까?


도와드렸습니다. 2006년 로봇랜드 국책사업 공모가 있었는데 경남도지사와 마산시장이 청와대에 있는 저를 찾아왔습니다. 대화 끝에 힘껏 도와주겠다고 약속드렸죠. 다음날부터 심사를 담당하는 위원들을 설득하러 쫓아다녔습니다. 마침 심사위원 중에 청와대 근무했던 동료가 있어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마산이 로봇랜드 사업을 유치했죠. 물론 무엇보다 경남과 마산시가 준비를 잘했기에 가능했던 거겠죠. 어쨌든 저로서는 다른 정당 사람과 지역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민원 해결이 쉽지 않은데 힘든 일은 없었습니까?


창녕 군청 뒤에 한센병 환자들이 주거하는 소혜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생계수단으로 닭과 돼지를 기르고 있었는데 악취가 심하고 오염물질이 우포늪까지 흘러들어갔어요. 창녕 군수가 그 민원을 들고왔는데 난감하더군요. 그걸 옮기려면 60억이 듭니다. 농림수산부 물어보니 그런 예산 항목이 없데요. 여러 부처 공무원들을 찾아다니면서 논의했는데 환경부 공무원이 그걸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당시 람사르총회를 2년 앞두고 있었는데 우포늪의 오염원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는 설득이 가능했던 거죠. 똑같은 건데 표지만 바꿔 환경부 예산으로 처리했습니다. 주민 민원도 해결하고 소혜원 고충도 해결하고 우포늪도 살리고 람사르총회 준비도 하고 그야말로 일석사조의 행정이었던 거죠.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일이 달라지는군요


그게 일머리죠. 그 환경부 공무원이 일머리가 있는 겁니다. 공직 권력은 두가지입니다 선거로 선출된 권력과 시험으로 선발된 권력. 두 권력이 잘 협조해야 일이 잘 풀립니다. 윽박지른다고 일이 되진 않습니다. 둘 다 일머리가 좋아야 하지만 특히 선거에서 선출된 권력이 일머리가 좋아야 합니다. 선거로 선출된 권력은 시험으로 선발된 공직자 권력을 잘 이끌고 소통하고 협의하는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제가 경남 정무부지사 시절 공무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했습니다. 소통을 통해 업무를 파악하고 일을 해나갔죠. 권력을 제대로 쓸려면 소통을 해야합니다. 


청와대 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을 자주 뵈었습니까?


볼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86년 구속되었을 때 노무현 변호사 대신 들어오셔서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만큼 개인적 인연은 없습니다. 오히려 지난 총선 때 노회찬 의원과의 단일화 문제로 많이 소통하고 교류가 있었죠. 창원 성산에서 저와 노회찬 의원이 단일화 하면서 야권의 지지세를 모으고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억은 하실 겁니다.  





창원의 문제 뭐라고 보십니까? 


74년 창원공단이 출범하면서 창원 계획도시가 출범했습니다. 이제 40년이 지나니 노후화된 부분이 생기고 활력도 점점 떨어져 갑니다. 인구도 매달 몇 백명씩 줄어 통합창원시 인구는 109만에서 105만으로 줄었습니다. 구조고도화와 혁신을 통해 경쟁력 확보해야만 현재 일본 미래의 중국과 경쟁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신산업 유치해야만 창원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창원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리더쉽이 필요합니까? 


지역에 깊은 애정과 이해가 바탕이 된 리더쉽이 필요합니다. 지역의 전통을 살리고 미래를 가꾸기 위한 전략이 있어야만 지역의 자존감을 높이면서 발전하는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그 동안 창원의 리더쉽은 부족한 게 많았습니다. 지역을 잘 모르는 사람이 시장이 되면 지역의 실체를 파악하다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고 슬로건으로 주민을 혹세무민하죠. 그건 공직생활 연장하기 위해 주민을 이용하는 거죠. 이제 그런 리더쉽이 창원에 발붙이게 해선 안됩니다. 


통합 창원시의 갈등 어떻게 해결 가능할까요? 


통합이 되면 큰 도시가 되고 경쟁력이 좋아져 신세계가 생긴다 그랬는데 실제 통합해보니 좋아진 건 거의 없고 갈등만 생기고 나빠졌죠. 창원이란 이름이 강조되다 보니 마산이나 진해의 특성이 없어지고 그런 거 때문에 마산이나 진해 사람이 분노하고 가슴 아파합니다. 창원은 창원답게 마산은 마산답게 진해는 진해답게 각각의 특성을 더 살려서 발전시키는 게 더 좋은 창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 아닙니까. 각각의 색깔이 진할 때 더 아름답거든요. 마산은 마산의 색깔이 진하고 창원은 창원의 색깔, 진해는 진해의 색깔이 진할 때 전체의 색깔이 더 아름답겠죠. 통합 창원시에 이런 리더쉽을 발휘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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