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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시대청은 관수가, 재판가와 함께 동관의 3대청이다. 관수가와 재판가가 각각 왜관의 행정과 외교의 중심이었다면 개시대청은 무역의 중심이었다. 매월 6회 조선과 일본의 상인들이 개시대청에 모여 교역을 했다. 

 

당시 부산은 변방 중에 변방이었지만 무역만큼은 조선을 넘어 동북아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 변승업은 초량왜관에서 부를 모았을 정도였다. 왜관 무역을 독점한 대마도의 1691년 사무역 거래표엔 조선과의 무역으로 거둔 이윤이 3,577관(금 7만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금 시세로 계산하면 약 1500억원 정도가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매출이 아니고 이윤이다.

 

 


  

조선은 사무역 금지를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왜관의 사무역은 허가했는데 1610년 영의정인 이덕형의 국왕에 대한 전언 속에 그 사정이 나온다. 참고로 임란 후 조선은 국방상의 이유로 일본 사절을 부산 초량왜관 이상 못올라오게 했다.

 

"왜관에서 사무역을 금지하면 오히려 밀무역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또 대마도는 사절을 상경시키려고 집요하게 요청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에 사무역을 용인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외적으로 허가된 사무역이기에 관리는 엄격했다. 조선의 훈도·별차 등과 일본의 대관왜 입회 하에 교역이 이루어졌다. 개시무역에 참가하는 상인에도 30명의 제한이 있었는데 왜관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상인을 동래상고라 불렀다. 

 

 


  

그림 속 노란 화살표 지점이 개시대청이다. 관수가에선 약 2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개시대청 아래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시된 지역은 개시대청에 입회하며 무역 관계의 업무에 전문적으로 종사한 대관왜가 거주한 대관가이다. 대관왜는 관수의 감독 아래 최대 24명까지 체제했다.

 

 

약조제찰비. 현재 부산박물관에 있다.


 

개시대청을 조금이라도 벗어나 이루어지는 거래는 금지되었다. 1683년 동래부사와 대마도주 대마도 도주 사이에 왜관운영과 관련하여 체결된 내용을 새긴 약조제찰비 세번째 조항엔 "방마다에 몰래 들어가서 비밀로 서로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은 각각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나와있다. 그럼에도 왜관의 밀무역은 근절시킬 수 없었다. 수문을 지키는 문장과 역관들과의 내통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 왜관에서 일본에 수출한 최대 품목은 백사(50%)였다. 그러나 백사는 중국 상품이었다. 왜관에서 수출된 순수 조선의 상품 중 최대의 수출품은 인삼(20%)이었다.

 

당시 일본에선 인삼 열풍이 불었다. 인삼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다. 그런만큼 인삼은 비쌌는데 1707년 인삼 1근의 값이 금 24냥이었다. 지금 금 시세로 계산하면 인삼 600g이 5천만원인 셈이다. 그래서 인삼을 먹고 살아난 사람이 인삼 사느라고 진 빚을 못 갚아 목을 맸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인삼대왕고은. 일본 은은 개의 혀를 닮았다고 개설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선이 왜관을 통해 일본에서 수입한 최대의 상품은 은이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수입품 중 70%가 은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 은의 최종 수요가 아니었다. 은본위제 중국이 당시 제 2의 은 수출국 일본의 은을 빨아들였고 조선이 왜관을 통해 그걸 중계무역 했다. 조선의 사절이 중국에 파견되는 시기에 맞추어 일본의 은이 이동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막부가 은 수출을 금지시킨 1685년 이후에도 일본은 왜관에 대해서만은 은을 수출했다. 조선이 일본의 은을 계속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삼 덕분이었다. 18세기 초 화폐 개주로 은의 순도가 떨어져 인삼을 확보할 수 없게 되자 인삼에만 교환가치를 가진 전대미문의 인삼대왕고은이라는 화폐까지 만들 정도로 일본은 인삼에 미쳐있었다. 우스개로 초량왜관 인삼이 당시 일본을 들었다 놨다 했던 것이다. 인삼을 국산화 한 18세기 중반 이후에야 일본의 은 수출금지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산 은구리 아시아 화폐경제망 엮다

 

 



  

 

은이 사라진 후 구리가 최대 수입품 자리를 이어받았다. 1678년 조선은 상평통보를 주조하기 시작했는데 화폐 유통량은 점점 늘어나면서 돈을 주조할 구리가 부족해졌다. 부족한 구리를 일본에서 구입했는데  연간 4만 5천근 가량이었다고 한다. 소래풍요에 구리가 수입되는 장면을 그린 시가 실린 것만 봐도 당시 구리 수입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소는 지치고 수레는 하도 무거워

힘들고 지친 소들

열 두발자국 내디디려며

두 번이나 쉬어야 하누나

 

묻노니 저 수레이

그 무엇이 실어가는고

관청에서 돈을 부으려

구리쇠를 실어간다네

 

이 쇠 나는 고장은

남쪽의 섬오랑캐 나라

동래고을 큰 장사치의

거간 알선으로 사온다네

 

 


19세기 후반 부산해관 모습


 

1872년 초량왜관이 폐쇄되면서 개시대청은 자동적으로 사라졌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하면서 부산의 무역은 더 활발해졌지만 조선은 개시대청 같은 무역주권을 잃어버렸다. 무관세 무역으로 부당이득을 취해온 일본이 조선의 관세권 회복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이 마지못해 관세협상을 벌이기 시작해 그 다음 해 10월 지금의 부산데파트 자리에 부산해관이 생겼다. 지금도 부산 데파트 뒤쪽 도로를 해관로라 부른다?

 



 

개시대청 일대는 개시가 열리던 그때처럼 지금도 옛 동관 일대에서 가장 일본인들이 많이 붐비는 지역이다. 부산호텔을 나와 관광을 나서는 일본인들을 흔히 볼 수 있고 거리 양 옆 상점의 간판은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많고 눈에 띄게 붙여져 있다. 몇년 전엔 이 거리의 시선 끝에 일본인에게 익숙한 롯데백화점까지 더해졌다.

 

 


 

 

조선 정부의 화폐유통활성화 정책으로 조선 후기 왜관에선 조선 동전의 거래가 활발했고  환전업무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금융가로도 유명하다. 옛 개시대청 일대를 둘러싸고 5개의 은행이 모여있고 곳곳에 의자에 앉아 환전을 해주는 환전상들도 볼 수 있다. 이런 오늘날의 풍경이 과거 개시대청이 있었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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