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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성 금정구 구의원은 생활정치를 표방한 개혁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아침엔 닭을 배달하고 오후엔 정치활동을 하면서 생활정치를 실천했다. 이렇게 쌓인 생활정치는 구의원으로 이어졌다. 주민들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가 각종 민원을 해결하면서 평판을 얻었다. 그리고 지난 지방선거 보수색이 강한 금정구에서 1등으로 재선되었다. 생활정치로 쌓은 박종성 의원의 탄탄하고 스토리가 있는 정치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 생활정치를 표방한 개혁당에서 정치 입문

- 주민들의 의지와 명분이 있으면 가능성 10%의 민원이라도 도전한다

- 구의원은 마을 권력의 정점이 아닌 정치의 시작

- 금정구의 숨겨진 자원 태광산업

 


정치는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정당에 가입한 건 2002년입니다. 정말 우연이었어요. 노사모 찾다가 옆에 뭔가 뜨길래 클릭해서 들어갔는데 그게 개혁당 가는 길이었죠. 당비 각자 내고 당직도 당원이 직접 선출하더라구요. 강령이 맘에 딱 들었어요. 바로 당원 가입하고 정당활동을 시작했죠. 제가 정치평론을 좋아해서 개혁당 게시판에 글을 자주 올렸습니다. 당원들 사이에선 필명으로 이름이 알려졌죠. 책 읽고 토론하는 역사연구회를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2주에 한 번씩인데 30명 정도가 모였죠. 당에서 이래저래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개혁당이라면 좀 생소한데


2002년 당시 민주당 내에서 후단협의 노무현 후보 흔들기가 극심했습니다. 그게 계기였습니다. 기존 정당의 문제점과 한계를 뼈저리게 깨닫은 시민들이 생활정치를 실현하겠다며 만든 게 개혁당입니다. 소통은 물론 정당의 결정을 인터넷을 통해서 한 인터넷 기반 정당이었습니다. 유시민 전 장관님이 함께 하셨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힘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새로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대부분 들어가면서 해체되었습니다.  



당선 직후 개혁당 사무실을 가장 먼저 찾은 노무현 대통령



정당활동이 생업에 지장을 주진않았나요?


아버지께서 제가 20살 때 금성동에 들어오셨습니다. 병아리 3천마리로 양계유통을 시작하셨고  그 업을 제가 물려받았습니다. 오전에 3~4시간 정도 일하면 그 날 작업은 마무리 됩니다. 정당 활동은 닭배달 끝내고 오후에 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2001년 아버지께서 닭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닭장을 논 위에 만드셨어요. 조류와 습기는 상극인데 그걸 모르셨어요. 닭들이 다 죽고 폭망해서 빚이 6억 생겼죠. 그것도 제가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그 빚을 몇 년 전에 다 갚았습니다.  



2010년에 구의원 당선되셨는데 선거에 나가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2009년 5월 23일 아침에 집사람 전화가 왔어요. 받았는데 막 펑펑 우는 거예요. 우리 사무실에서 봉하마을까지 20분 정도 걸리거든요. 거래처에 늦는다고 전화하고 닭 배달하던 냉동차 끌고 즉시 봉하마을로 갔죠.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지켜보면서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지역에서 부딪히자 다짐을 했고 그때부터 지방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했죠. 



금정구면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시절 패배할 정도로 부산에서도 보수적인 지역인데...


당시 대결한 후보들이 처음엔 저를 후보 취급 안했습니다. 출마를 결심하고 지역위원회를 먼저 강화했습니다.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그루터기라는 역사동호회를 만들었는데 거의 매번 만차였습니다. 105일 선거운동 하면서 102일을 사무실 라꾸라꾸 침대에서 잤습니다. 개표결과 득표율 31%를 받았습니다. 1등과 1% 차이였죠. 직전 2006년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가 13%를 받았거든요.



구의원 되고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처음엔 뭘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무도 안 가르쳐줘요. 몇 일 지나니까 청첩장이나 날라오고. 그러다 구청장 동순방 현장에서 장전동 만세한신아파트 주민들이 항의하는 걸 봤는데 구청장이 먼 산만 보더라고요. 들어보니 주민들 얘기가 맞아요. 만세한신아파트가 200세대 작은 아파트인데 바로 옆에 1300세대 sk아파트가 들어섰거든요. 만세한신아파트 주 출입구가 지하인데 sk아파트에서 나오는 도로에 직각 방향으로 되어있어 사고나기 딱 좋더라구요. 사고위험을 줄일려면 도로가 일방통행이 되어야 겠더라구요. 그뒤 주민들을 찾아갔습니다. 처음엔 크게 기대 안하시는 눈치더라구요. 일단 서명을 좀 해주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주민들 서명 97%를 받았어요. 거의 해결되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교통안전심의위에서 부결되었다는 거예요. 





부결된 이유가 뭡니까?


sk아파트 동의가 왜 없냐는 거예요. 그래서 도로 개통하지 말고 놔두라고 해놓고 다시 sk아파트 동대표들 동의서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다행히 다 동의해주셨어요. 그때는 시간이 흘러서 만세한신 아파트 주민들도 포기할 때였는데 해결했다고 하니 난리가 난거예요. 동네 주민들이 제게 점심도 사주시고. 그게 9개월만에 해결했거든요. 



첫 민원인데 해결하시고 어떤 느낌이셨어요.


‘아 의정활동은 이렇게 하는구나’ 깨달았죠. 그때부터 제가 200세대 이상 아파트 입주자회의를 모두 다 찾아갔습니다. 처음엔 경계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심지어 6개월 동안 거부하다 나중에 만나주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그렇게 안면 트고 민원도 듣고 하면서 지역 현안을 알아갔죠. 브니엘고등학교 앞에 버스가 없다는 얘기를 2011년에 들었는데 그것도 4년만에 해결했습니다. 지금은 301번 버스 들어오고 있습니다. 박석민 시의원과 힘을 합쳐 해결했죠. 



이후로 민원이 많이 들어왔겠는데요.


집단 민원이 엄청 많았어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아파트와 원주민 사이 민원들. 대안을 만들어 설득하고 주민 공청회나 간담회를 많이 열었어요. 현안이 발생하면 저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고 항상 주민을 앞세웠어요. 주민들이 방향을 잡도록 마중물 역할을 했죠. 주민들이 지속성이나 활동성이 저보다 떨어지니까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채워드리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설득이 쉽지 않은 민원도 많았을텐데...


어려운 민원도 많았죠. 벽산블루밍아파트 주민과 원주민 사이에 갈등이 있었어요. 서로 많이 싸웠어요. 그래서 끝장토론 해보자며 장전동 주민센터에 다 모이라고 했습니다. 찬성팀과 반대팀 1분씩 토론하게 해서 2시간을 돌렸습니다. 그러니깐 나중엔 서로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더라구요. 그러면서 갈등이 해소되었습니다. 주민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장과 룰을 만들어주면 좋은 방향으로 결정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모든 민원을 다 처리할 수는 없잖습니까? 어떤 민원을 맡았습니까? 


주민들 의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명분이 있어야죠. 의지와 명분이 있으면 가능성 10%라도 갑니다. 산성터널 장전동 쪽 공사 소음분진이 엄청났어요. 이걸 아파트는 조직이 잘 되어 있어 상대하는데 단독주택은 어르신들이 많아 잘 안돼요. 이 분들이 견디다 못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업체가 똥줄이 타야 해결이 쉬운데 공사가 이미 고비를 넘겼더라구요. 주민협의회 만들고 대표를 뽑아 주민간담회를 10차례 이상 열었습니다. 처음엔 회사에서 가구당 보상금을 주겠데요. 그런데 건설공해는 집이 아니라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거잖아요. 가구마다 사는 사람 숫자도 다르고. 보상 과정에서 한 사람도 소외되면 안된다고 했죠. 산성터널 건설 담당자와 여러차례 만나 설득하고 양보받아 결국 14개월만에 해결했습니다. 주민들이 ‘박종성이 대단하다’ 그러시는데 이건 사실 주민들이 14개월 동안 안 흔들리고 끝까지 갔으니 가능한 거거든요. 의지만 있으면 저는 얼마든지 도와드립니다. 



그런데 주민들 민원이 보수보다는 진보정당 정치인에게 더 몰리는 거 같은데


보수정당 사람들에게 구의원은 청년회부터 시작해서 올라간 마을 권력의 최고 정점이예요. 관변단체 활동 열심히 해서 보상으로 받는 게 구의원이죠. 반면 민주당 같은 정당은 구의원이 정치의 시작입니다. 보수정당은 갈등보다는 봉합이 중요하고 진보정당은 정치를 시작하기 때문에 현안의 해결이 중요합니다. 구의원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니 서로 활동 반경이 다른 거죠. 보수정당 의원들 정치력 인정합니다. 지역 현안 발생하면 안 시끄럽게 조정을 아주 잘해요. 그런데 현안이 발생하면 개입을 잘 안 할려고 합니다. 





지난 지방선거 결과는 어땠습니까? 


2014년 지방선거에선 제가 1등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구의원으로 지낸 8년 어땠습니까?


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았죠.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서 밤새 토론하고 해결하는 게 정말 재밌습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고개를 잘 못숙입니다. 지역을 벗어날려면 힘 있는 사람에게 잘보여야 하는데 그게 안되요. 저는 정치를 지역에서 하는 게 맞습니다. 



지역 정치인으로 살면서 얻은 지혜라면


항상 현안이 생기면 주민들에게 서명을 부탁합니다. 초선 때도 7천명 서명을 받았어요. 서명으로 주민들에게 동참하고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고요. 저는 그 서명으로 혼자가 아니라 여러사람이 동참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힘을 얻게 됩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 이게 의원생활 저의 모토입니다. 공론을 잘 잡아내는 게 의원의 핵심이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의원 권력으로 알아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주민과 같이 가야하는 거죠.





금정구를 어떤 도시로 만들고 싶습니까? 딱 하나만 얘기해주세요.


무엇보다 교육환경이 좋은 도시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은 게 모든 부모들 마음이거든요. 제 지역구에 금성초등학교라고 학생이 없어 폐교하려던 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가 공립형 대안학교로 커리큘럼을 자유화 하면서 지금은 포화상태예요. 학생들이 너무 많이 와서 금성동 거주자로 제한하니까 학부모들이 이사를 와요. 빈집부터 차더니 나중엔 발라가 막 생기는 거예요. 교육환경이 좋으면 사람이 몰린다는 거죠. 그럼 금정구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해운대 신시가지처럼 사교육을 강화할 수는 없습니다. 공교육을 조직적으로 강화해서 금정구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수준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면 어떨까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겠습니까. 



지역을 바꾸는 게 많은 노력도 필요하지만 간단한 아이디어로도 가능한 게 있습니다. 금정구에 그런 아이디어 하나만 제시한다면


구서동에 태광산업 공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공간이 완전히 비어있습니다. 그걸 활용할 생각을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젋은 예술가들에게 숙소와 작업실을 제공하고 월세는 작품으로 받아서 꾸미면 지역의 명소가 될 수 있습니다. 공장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 시키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많거든요. 구청장이 태광산업 회장 만나서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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