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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

 

 

1990년 일본은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궁중만찬회에서 한일우호를 강조하며 일본의 역사적 인물 한 명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 말 때문에 일본에선 난리가 났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말한 그 이름을 아는 일본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언급한 인물은 300년 전 조선외교전문가로 활동한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다. 호슈는 1702년부터 조선을 드나들었는데 1728년에는 실무외교에서는 최고의 직위라 할 수 있는 재판(왜)의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유학자가 외교관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했던 쓰시마번이 유학의 나라 조선과의 외교를 유학자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호슈가 만든 조선어 교과서 '교린수지'

 

 

외교관으로서 호슈의 사상은 지금봐도 놀랄 정도로 객관적이고 세련됐다. 호슈는 임진왜란을 대의명분이 없는 살상극으로 규정했다. 나아가 한·일 간에는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로 고 교류해야 한다는 성신지교(誠信之交)를 주창했다. 그는 또 외교에서 통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통역관은 말만 잘해선 안되며 인품도 뛰어나고 재치있고 의리를 분별할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화살표가 재판가. 동그란 표시 부분은 3대청인 관수가와 개시대청.


 

1728년 재판왜로 부산에 왔던 호슈가 초량왜관에서 머물렀던 곳이 바로 재판가다. 재판가가 동관 3대청 중 하나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재판왜는 일본 측으로선 중책이었다. 조선도 재판왜를 일본과의 외교에서 중요 인물로 보고 팔송사보다 후하게 대접했다.

 

재판왜의 '재판'은 오늘과 같은 사법적 의미가 아니라 조선과 일본 양국간 외교 현안을 재판(해결)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재판왜는 조선 전기에는 없었던 직책이다. 재판왜가 나타나게 된 건 겸대제 덕분이다.

 

1635년 이전까지 일본에서 조선에 오는 배들은 사신이 동승했고 조선은 그들을 일일이 접대해야 했다. 이에 부담을 느낀 조선은 교섭을 벌여 외교적 의례를 갖춰야할 배를 대폭 줄이는 겸대제를 실시한다. 대마도주의 경우 20척 중 5척만 접대하기로 했다. 그러자 나머지 15척은 무역선의 기능만 하게 되었다. 겸대제는 조선의 접대 부담을 덜었을 뿐 아니라 무역과 외교를 분리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되니 쓰시마번은 외교 현안이 있을 때면 따로 사절을 보냈다. 이건 조선과의 교역에 섬의 운명이 달린 쓰시마번의 꼼수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낸 사절을 차왜라고 했는데 조선은 처음엔 인정하지 않다가 17세기 후반부터 응접 기준을 정례화 한다. 이들 차왜 중 교섭 등의 외교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온 자들을 재판차왜라고 했는데 이들이 상주 관리화 되어 재판가에 머물렀던 것이다. 

 

 

조엄은 1763년 통신사행에서 고구마를 목격하고 조선의 절영도(지금의 영도)로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인의 접대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기에 조선이 겸대제를 실시하게 된 걸까? 18세기 중반 동래부사를 역임했고 통신사도 다녀왔던 조엄의 일본사행록에 그 내용이 잘 나와있다.

 

"이로써 한 해 동안 주게 되는 여러 잡물을 통틀어 값을 따져 계산해 보면 30만량이 훨씬 넘는다. 흔히 하는 말로 경상도 재정의 반이 왜에게 주는 것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것이 꼭 그렇지는 않으나 그 수가 진실로 많다. 저 사람들이 바치는 것을 말하면... 각종 잡물들인데 모두 합쳐 값을 따지면 3만여 금에 지나지 않으니 그들이 바치는 것을 우리가 주는 것에 비교하면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교린제성에서 제성은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호슈는 이 책에 조선과의 외교에서 주의해야할 54개의 항목을 썼다.

 

의문은 이어진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그렇게까지 일본을 접대한 걸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초량왜관 관리를 평화유지비용이라고도 하는데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호슈가 남긴 책 '교린제성'의 8번째 항목에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 호슈는 조선이 중국의 예를 따랐다고 말한다.  

 

"중국인이 조선에 장사하러 온다고 해도 쌀과 땔감을 주며 접대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무역을 하기 위하여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사신을 조선 측이 접대하는 것은 중국의 예를 따른 것이다. 예컨대 변방민족이 개시를 위해 중국에 가면 멀리서 온 사람을 위로하고 달랜다 하여 중국 측이 역마를 주며 식량을 갖추어 주는 일이 송사에도 기록도어 있는데 조선도 그 예를 따랐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으로서는 관대한 조치이기는 하지만 쓰시마번으로서는 심적으로 편안한 일은 아니다."

 


 

재판가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타워힐호텔 부근이다. 이 곳도 일본어 간판을 단 집들과 일본인을 쉽게 볼 수 있지만 관수가나 개시대청 앞보다는 덜 하다. 초량왜관 시절 그림을 봐도 여기는 앞으론 담벼락 넘어 바다이고 뒤로는 용두산이 있는 덜 밀집된 곳이었다.

 

1877년 부산구조계조약에서는 '옛 재판가를 제외하고 조선에서 만든 2동의 건물은 일본에서 만든 옛 개선소와 창고 6동과 교환하여 양국 관민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개항 당시에는 동관 3대청 중 관수가와 개시대청은 일본이 사용하고 재판가는 조선이 쓰기로 한 것이다. 관수가와 개시대청이 부청과 병원 등 공공기관이 되고 재판가가 상점이 된 데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 같다. 지금의 거리 모습도 그에 영향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워힐호텔 앞에서 '재판가'의 흔적이 될만한 게 있을까 둘러봤는데 관계지을만한 건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길 아래 중앙동주민센터가 있었는데 민원을 해결하러 찾아오는 주민과 외교문제를 해결하러 온 재판왜가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잠시 들었다.

 

 

 

 

타워힐호텔 맞은 편 부산호텔은 재판가 인근의 응방이 있던 곳이다. 응방은 매를 사육하는 곳으로 당시 일본 막부장군이나 지방영주 등에게 여기 매를 바쳤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에서도 매사냥이 계승되고 있는데 그들도 조선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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