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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본인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동네를 꼽으라면 단연 동광동이다. 동광동의 부산호텔은 일본인 전용호텔이라 할 정도로 일본인들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거기서 부산데파트에 이르는 거리는 일본어 간판을 내건 상점들이 즐비하다. 일본인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상가가 밀집해 있는 건 지리적 잇점 때문만은 아니다. 동광동의 일본인 거리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역사적 유래가 있다.

 

 

1894년 부산항


 

1876년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킨 일본은 년 50엔을 주고 부산에 일본의 전관거류지를 만들었는데 바로 그 거류지의 중심 지역이 지금의 동광동이다. 동광동에 거류민을 위한 일본영사관이 세워졌고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면서 영사관은 부산의 행정 중심인 부산부청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부산을 찾는 일본인들은 그들이 익숙한 동광동을 먼저 찾았을 것이고 그러한 일본 방문객의 습성이 동광동을 일본인의 거리를 만든 것 같다.  

 

 

 

 

일제시대 지도엔 동광동이 본정이라 표기되어있다. '본정'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동광동은 일제시대 부산의 중심지였다. 염상섭은 소설 만세전(1922년)은 동광동 일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부두를 뒤에 두고 서편으로 곱들어서 전찻길 난 대로만 큰길로 걸어갔으나, 좌우편에 모두 이층집이 쭉 늘어섰을 뿐이요, 조선집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띄이는 것이 없다, 2, 3정도 채 가지 못하여서 전찻길은 북으로 곱들이게 되고 맞은 편에는 색색의 극장인지 활동사진관인지 울그대불그대한 그림조각이며 깃발이 보일 뿐이다."

 

부산에서 조선인과 조선 건물을 찾지 못한 건 그 반세기 전 부산에 온 비숍여사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말 부산구도심은 이미 일본화 되어있었다. 1897년 출판된 비숍여사의 기행문《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느 점으로 보나 부산의 거주지는 일본식이다. 5,508명의 일본인 이외에도 일본 어부 8,000명이 유동하고 있다. 일본 총영사는 좋은 유럽가옥에서 살고있다. 도쿄의 다이이치은행이 은행 업무를 제공하고 있으며 우편·전신 업무도 또한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독자들은 성급하게 물을 것이다 <조선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일본인에 대한 글을 읽고 싶은 것이 아니다>라고. 나도 일본인에 대해 쓰고싶지 않으나, 사실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위의 모습들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부산이다."


 

1936년 조선일보 기사

본정은 부산만 아니라 서울에도 있었다.

 


부산포 왜관회도 부분(조선사료집진)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동광동을 중심으로 전관거류지를 만들었을까? 그건 이 지역이 그전부터 유사한 역할을 했고 해방 후 부산을 찾은 일본인이 동광동에 익숙한 것처럼 당시 일본인들에게도 그랬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동광동은 바로 초량왜관의 동관이다. 대일 외교와 무역 등 초량왜관의 대부분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동관에서 이루어졌다. 동관은 초량왜관 그 자체였다. 거류지를 동관을 중심으로 형성하는 건 일본인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출처 : 중구 홈페이지

 

 

동광동의 지도를 보면 동광동의 역사적 유래가 깊음을 느낄 수 있다. 동광동 지도의 안쪽으로 둥글게 패인 선은 부산만이 매립되기 전의 해안선 지형에 가깝다. 용두산 아래 해안을 끼고 형성된 초량왜관 동관의 지형이 지금의 동광동에 전사되어 있는 것이다. 동광동이란 이름도 초량왜관의 동관에서 유래했다. 동관의 발음이 어려워 광복동 옆에 있는 동네라는 의미까지 함께 담아 동광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현재 동광동 일대에서 초량왜관 유적은 찾을 수 없다. 300년이란 시차 때문만은 아니다. 개항 당시 몇백명에 불과하던 부산의 일본인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1910년 2만명을 넘어섰다. 일본은 초량왜관을 거류지로 개발하기 바빴다. 1925년 발표된 초량왜관 논문을 보면 이미 그 당시 초량왜관 건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일본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동광동의 유적에 한국인들도 애정을 가지긴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에 의해서 파괴되고 이후 방치되면서 초량왜관은 사라져갔고 그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만이 동광동 일대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변박의 초량왜관도 일부

 

 

하지만 200년 넘게 존재했던 초량왜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초량왜관은 희미한 흔적들을 일부에 남겨놓고 있다. 학자들은 부산데파트 바로 뒤 봉아주차장의 이 담벼락을 초량왜관 당시 해안 석축으로 추정한다. 대마도에서 배가 도착하면 이 석축에 배를 대고 일본에서 온 상품들을 옮겼을 것이다. 

 

 

 

이 계단도 초량왜관의 흔적이다. 초량왜관 당시 관수가의 그림을 보면 이 계단과 거의 흡사한 모양의 계단이 그려져 있다. 초량왜관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이 계단은 최소한 120년 이상된 걸로 추정하고 있다.

 

동광동 거리의 일본인들에겐 300년의 역사적 유래가 있다. 초량왜관 동관의 일본인들이 새긴 기억이 자식의 자식에게로 이어져 지금의 일본인들이 동광동 거리를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초량왜관의 유적은 사라졌지만 동광동을 찾는 일본인들의 습성은 우리에게 초량왜관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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