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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초량왜관 설치와 동시에 3개의 신사를 건립했다. 용두산에 금도비라신사(고토히라진자)와 변재천신사(벤자이텐진자)를 세웠고, 용미산엔 옥수신사(타마다레진자)를 세웠다. 그 후 도하신사(이나리진자)와 조비내신사(아사히나진자)를 더 세워 초량왜관에 모두 5개의 신사가 있었다. 


초량왜관의 신사들은 기복신앙적 성격의 제신들을 주로 모셨다. 금도비라신사와 조내비신사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였고 변재천신사와 도하신사는 재물신과 상업신이었다. 용미산의 옥수신사만 유일하게 고대 전설적 무장과 관련된 신사였다. 


 

일본 가가와현에 있는 금도비라궁. 출처 : 일본위키피디아 금도비라궁

출처 : 일본위키피디아 금도비라궁



이들 신사들 중 가장 중심적인 신사는 대마도주 요시자네가 용두산 꼭대기에 세운 금도비라신사다. 금도비라신사는 개항 후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되었다가 1899년 다시 용두산신사로 이름이 바뀐다. 용두산신사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다른 신사들을 경내에 부속시키며 규모가 커지다 1936년엔 경성신사와 함께 조선총독부가 일체의 비용을 부담하는 국폐사로 승격하게 된다.


  

용두산신사의 국폐사 승격을 알리는 부산일보. 당시 부산일보는 지금의 부산일보와 다른 일본인들의 부산일보였다.

출처 : 한국근현대신문자료

 


초량왜관 시절엔 재물신을 모신 변재천신사가 더 번성했다고 한다. 변재천신사는 상인들이 돈을 모아 용두산자락 남쪽에 세운 신사인데 그 부근에는 초량왜관의 상가들이 몰려 있었다. 변재천신사는 번성의 흔적을 일제시대에까지 남겼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그 일대를 변천정이라고 부른 것이다. 변천정은 이후 부산 중심가로 발전했고 해방 후에도 광복동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왼쪽 아래는 변재천신사의 전경이고 왼쪽 위는 용두산신사에서 본 변재천신사의 모습이다. 오른쪽 이미지는 용두산공원 정상의 신사들 위치도이다.

출처 : 弁天神社龍頭山神社

  


그러나 초량왜관 신사들은 개항 직후 거의 버려진 폐사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무역이 쇠퇴한 영향으로 보이는데 초량왜관의 신사들이 재건된 것은 개항 후 거류지가 조성되면서부터였다. 1880년 거류민들은 기부금을 모아 신사(금도비라신사)를 처음으로 재건했고 1899년 대대적으로 모은 1만원의 모금으로 다시 개축한다. 이렇게 해서 신사는 초량왜관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축물이 되었다. 


전날 우리가 지나온 서양 삼나무숲이 빼곡하고 산꼭대기에는 일본식 사찰이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보인다. 기복이 심한 돌계단들과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한참 걸어올라 그 사찰에 이르면 화려하게 장식된 수많은 봉납물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그것들 하나하나 속에는 숱한 조난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일본인들이 신들께 드리는 감사와 기원의 마음이 묻어있는 셈이다. 그곳에 그려진 그림들은 마치 가톨릭 성당의 그림들을 연상시키는데 눈에 띌만한 걸작이랄 순 없지만 제벌 실감나게 묘사된 난파한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몸짓들이 신들을 향한 믿음과 감사의 뜻을 호소력 있게 드러내고 있다. 사찰이 있는 산자락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샤를르바라 조선종단기 1892년)


1892년 부산을 방문한 샤를르바라가 조선종단기에 남긴 용두산신사 관련 부분이다. 이때만 해도 용두산신사는 초량왜관 시절의 기복적 신앙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거류지를 거치고 일제시대로 들어가면서 신사들은 그 성격이 점점 변해갔다. 순수한 기복신앙적 성격에서 국수주의로 나중엔 일본 제국주의의 파시즘의 사상적 지주로 신사의 역할은 바뀌어갔다.


 

일제시대 용두산 일대 모습. 출처 : 부산근대역사관

 


명치유신 직후 일본은 신사를 정부의 직접 지배하에 조직하는 제정일치를 포고하고 1882년엔 신도는 국가의 제사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타 종교에 대한 절대 우위도 확립한다. 일본은 이런 신사를 식민지에도 동원했다. 1915년 총독부는 신사사원규칙을 발표하고 신사의 건립을 장려한다. 그리하여 1945년 6월 이 땅엔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등 작은 규모의 신사를 합하여 약 1100여개의 신사가 존재하게 된다.


총독부의 신사사원규칙에 맞춰 부산은 용두산신사를 중심으로 용두산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한다. 1916년 완성된 이 사업으로 용두산공원에 올라가는 4개의 도로가 만들어졌고 용두산공원이 지금과 같은 삼단 계단식 평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원래 이순신 동상 주변에 있던 용두산 신사는 최정상부인 지금의 부산타워 자리로 옮겨졌다. 1933년에는 용두산공원에 102척의 일장기 게양대가 세워진다. 1935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후엔 전차를 타고 가다가도 용두산신사를 향해 큰절을 해야했다.


 

지금의 용두산 모습과 거의 일치하는 삼단 계단식 평지 지형



용두산신사는 1945년 11월 17일 불태워졌는데 다른 지역의 신사들이 광복 직후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용두산신사가 일본 거류지 내에 있었고 해방 후 상당기간 귀환하는 일본인의 집결지로 쓰였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신사를 불태운 사람은 당시 37세의 청년 민영석이었는데 민영석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두 번이나 투옥되고 직장까지 잃은 기독교 청년 집사였다. 이 사실은 50여년이 지난 2007년 1월 본인 스스로 입을 열어 알려졌다. 


  

 



해방 후 용두산신사는 사라졌지만 부산 원도심 중심에 위치한 용두산의 상징성은 버려지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이승만의 호를 따 용두산공원을 우남공원으로 바꾸었고 1955년엔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 4.19혁명으로 다시 옛이름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용두산공원엔 기념비와 상징물들이 계속 건립되었다. 좋든 나쁘든 용두산공원의 상징성은 일제시대 이후에도 계속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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